일단 홍무제가 누군지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자 ~~~ !!!!

홍무제 주원장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 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托鉢僧)으로 지내다가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그뒤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가 꾀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병사하였다.
주원장도 대단하다. 탁발승(막말로 거지) 이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다니...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후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하여 건문제(建文帝)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장의 넷째 아들과 맞손자 사이에서 골육상쟁을 벌인다. 건문제와 연왕(영락제)(燕王) 주체와의 전쟁을 역사는 정난(靖難)의 변이라 부른다.

북경 교외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집단 무덤인 명십삼릉(明十三陵)에 묻히지 않은 명나라 황제는 세 사람이다. 홍무제는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거기서 죽었기 때문에 남경에 있는 명효릉(明孝陵)에 묻혔고, 7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은 6대 정통제(正統帝) 주기진이 다시 8대 천순제(天順帝)로 복위하면서 명십삼릉이 아닌 금산에 묻히게 된다. 정통제/천순제는 자신의 제위를 빼앗았던 동생 경태제를 폐하고 왕으로 낮춘다. 그래서 명십삼릉에 안장하는 대신 경태릉(景泰陵)을 조성해 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게 된다. 건문제는 영락제가 남경으로 쳐들어왔을 때 실종되어 생사가 밝혀지지 않아서 아예 무덤조차 없다. 참고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17대 숭정제(崇禎帝) 주유검은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자 자금성 뒷산에서 목매어 죽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청나라의 배려로 황제의 예로 명십삼릉에 묻히게 된다.

위의 백과사전에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오지 않으나,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강의에 의하면...
왕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영락제는 사라진 건문제가 무지하게도 신경쓰였나 보다.

그 넓은 중국 땅덩어리를 다 뒤졌을 뿐 아니라,
오죽하면 62척의 배를 건축해 원정군을 보낸다. 건문제를 찾기위해 (물론 약탈과 교역도 했겠지만 ) 그 62척의 배는 ...한 척이 480여명의 사람을 실을 수 있다니, 얼추 계산해도 만여명이 넘는 대 인원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진출이 아프리카까지 갔었으며 , 7차례나 원정을 보낸다.
이것이 콜롬버스보다 1세기나 앞서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중국의 민족주의적 사기다, 사실이다  ........ 를 놓고 찬반이 뜨겁다.

아무튼.....

영락제는 건문제의 치세 4년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무던 애쓴 모양이다. 실제로 명의 기록에는 건문제 시대가 누락되어 있다. 홍무제는 홍무 31년에 죽는데, 영락제가 등극한 이후 명의 문서에는 홍무가 35년 간 지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는 영락제가 아버지 홍무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런 눈 가리고 아웅이 얼마나 통하겠는가. 여하간 정권을 장악한 영락제는 건문제의 옛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철현(鐵鉉)은 영락제를 보고도 의연히 돌아서서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영락제는 그의 귀와 코를 잘라서 삶은 후에 그의 입 속에 넣고는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철현은 “충신과 효자의 고기가 어찌 맛이 없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중국사는 이처럼 민망할 정도로 잔인한 이야기들이 많다.

영락제는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제거했지만 방효유(方孝儒)는 스승이기도 하거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서를 짓도록 명했다. 영락제는 그가 자신의 편이 된다면 황위를 찬탈한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 영락제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영락제를 그자리에 있기 까지한 최측근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방효유"만은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방효유를 죽이면 전국 학문의 씨가 마를 것이다. 라고 했다니, 방효유의 학식과 인격이 얼마나 높았는지 가늠해 볼만 하다 )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방효유에게 영락제는 강제로라도 조서를 쓰게 할 작정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다. 방효유는 마침내 붓을 들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에는 연적찬위 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영락제는 노발대발하며 “네가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설마 네 죄가 구족(九族)에게까지 미쳐도 좋단 말이냐?”라고 말한다. 그러자 방효유는 “구족이 아니라 십족(十族)을 멸해도 할 수 없는 일이오!” 라고 일갈한다. 영락제는 칼로 방효유의 입을 귀 밑까지 찢도록 하고 방효유의 본가, 외가, 처가 친척과 십족인 친구, 문하생을 잡아들여 방효유 앞에서 한 명씩 차례로 처형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방효유를 취보문 밖에서 책형에 처했다. 이 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847명이라고도 하고, 873명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벌일 것이다.

아~ 저 쓸데없는 말 한마디에 족(族) 하나가 더 멸한거 아닌감. 연적찬위라고 쓰고는 그 붓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고 하니,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고려의 충신이었던 정몽주나,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 또한 비슷한 죽음들을 맞이했으니....
역시 역사는 지식인들의 죽음으로만 이어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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